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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네이버도 신입 80% 이공계, SKY 문과보다 지방대 뽑는다

날짜 :
2021-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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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35만명씩 배출되는 전국 4년제 대학 졸업생 가운데 절반은 어문·경영·사회 같은 인문계 학과 출신이다. 하지만 국내 기업들이 뽑는 신입 직원의 80% 이상은 이공계 전공자로 채워지고 있다. 본지가 대학 정보 공시 사이트 대학알리미와 주요 대기업 채용 현황을 분석한 결과, 한국 취업 시장에서 대학의 인력 공급과 기업의 채용 수요가 전혀 맞지 않는 ‘미스 매치(mismatch)’가 심각한 상황인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의 한 대학교에서 한 학생이 구직공고가 붙어 있는 취업게시판 앞을 지나고 있다./조선일보DB

서울의 한 대학교에서 한 학생이 구직공고가 붙어 있는 취업게시판 앞을 지나고 있다./조선일보DB



실제로 2020년 서울 최상위권 A대학의 철학과 졸업생 취업률은 28.6%, 중문과는 55.6%이다. 반면 이 대학 재료공학과 졸업생 취업률은 85.7%, 컴퓨터공학과는 76.6%에 이른다. 서울 상위권 B대학도 철학(37.5%), 사학(45.8%), 정치외교학(40.7%) 등 인문계열 학과 졸업자 절반 이상이 취업을 못했지만, 컴퓨터공학(82.3%), 전자공학(75%), 산업공학(75.4%) 같은 이공계 졸업생은 대부분 취업에 성공했다. 이런 현상은 서울뿐 아니라 지방도 비슷했다. 부산 D대학의 정보컴퓨터공학과, 기계공학과, 항공우주공학과는 취업률이 모두 70%를 훌쩍 넘었고 전북 F대학은 컴퓨터시스템공학, 산업정보시스템공학, 소프트웨어공학 전공자 취업률이 80%에 이르렀다. 서울 주요 대학 인문계 전공자보다 지방대 이공계 전공자가 기업에서 더 환영받고 있는 것이다.

기업들의 이공계 인재 선호 현상은 갈수록 심화하고 있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현대자동차·LG전자 같은 대기업들이 지난 3년간 뽑은 신입사원 가운데 80%가 이공계 전공자였다. 네이버는 이공계가 86%, LG에너지솔루션은 90%에 이른다. 한 기업 인사 담당자는 “디지털 전환이나 미래 신성장 산업 발굴 등을 고려하면 지금보다 오히려 이공계를 더 뽑아야 하지만 조직 다양성을 고려해 인문계 20% 선발을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고교 때 선택과목에 따라 문·이과를 나누고 대학 전공 선택을 결정하는 현행 교육제도가 있는 한 인력 미스 매치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대학들도 일부 학과는 과감히 통폐합해 정원을 줄이고 기업이 요구하는 현장형 인재 교육을 늘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덕환 서강대 명예교수(화학)는 “문·이과 구분은 일제강점기에 도입된 낡은 제도인 데다 융합형 인재를 요구하는 현재 사회와는 전혀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2019년 2월 21일 오후 서울 성신여자대학교에서 열린 학위 수여식에서 한 졸업생이 취업 게시판에 걸린 채용 정보를 바라보고 있다. /장련성 객원기자

2019년 2월 21일 오후 서울 성신여자대학교에서 열린 학위 수여식에서 한 졸업생이 취업 게시판에 걸린 채용 정보를 바라보고 있다. /장련성 객원기자

문과 등용문 ‘마케팅·재무·인사’마저… 이과 우대로 돌아섰다

경희대 어문계열에 재학 중인 홍모(25) 씨는 지난해 상반기부터 취직 준비를 하면서 공채, 수시 채용 가리지 않고 30여 곳에 지원서를 냈다. 이 중 서류 전형에 통과한 경우가 3차례에 불과하고, 그나마 면접에서 모두 떨어졌다. 외국계 온라인 여행사 인턴 경력과 5개의 외국어 자격증을 갖고 있는 홍씨는 주로 국내·외 영업 관리, 마케팅, 기획 직군에 지원하고 있다. 하지만 기업들은 이 분야들에서도 대부분 ‘정보통신(ICT) 관련 자격증’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홍씨는 “인문계 전공자는 가고 싶은 기업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어디든 원서를 내고 뽑아주기만 바라야 하는 상황”이라며 “같은 과 친구 중에 30%는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기업은 디지털 전환하느라 문과생 외면

이런 상황은 홍씨만의 문제가 아니다. 인문계 졸업생을 필요로 하는 취업시장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기업들이 ‘이공계 우대’ 간판을 걸고 인재를 모집하기 때문에 인문계 졸업생들은 입사 원서를 내는 것조차 쉽지 않다. 인문계 취업 준비생의 ‘등용문’이었던 금융계는 물론이고 인문계 졸업생의 전유물이었던 기업의 마케팅·재무·인사 분야도 디지털 전환이 이뤄지면서 이공계 인재를 선호하고 있다. 한 중견기업 관계자는 “요즘 마케팅 전략에 데이터를 활용하고, 영업 현장에서도 AI(인공지능) 기반의 맞춤형 추천 기술을 쓰기 때문에 여기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있는 이공계 인재를 우선시한다”면서 “회계나 재무 같은 분야도 이젠 프로그램만 다룰 줄 알면 되기 때문에 이공계 인력의 활용 폭이 넓다”고 말했다.

은행도 최근 신입직원 채용공고 대부분이 디지털·IT·데이터 부문 일색이다. 국민은행은 지난 6월 200명 규모의 수시 채용을 진행하면서 ‘IT 부문’ ‘데이터부문’ ‘경영관리 전문가’ 3개 부문에서 신입 행원을 뽑았다. 경영관리 전문가 부문은 3년 이상의 경력이 있거나 석사 이상 학위 보유자가 조건이기 때문에 대졸 신입은 사실상 이공계만 채용한 것이나 다름없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같은 기술 분야 제조 대기업의 마케팅, 영업 인력도 이공계 출신이 월등히 많다. 갈수록 고도화되는 첨단 제품을 판매하기 위해서는 기술적인 이해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지난 2월 서울 상위권 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한 김모씨는 경영학 복수 전공을 하고 금융·경영 동아리 활동도 했는데 금융권 인턴 전형에도 한번 붙어보질 못했다. 김씨는 “지난 6월에 한 은행 인턴 모집 공고에 ‘공학·자연계열 우대’ ‘디지털 전환을 통해 데이터기반 정보회사로 만들어갈 인재’라고 나와 있는 걸 보고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원서를 냈지만 떨어졌다”고 했다.

서울 상위권 대학 인문계·이공대 취업률

서울 상위권 대학 인문계·이공대 취업률

◇등록금 수천만원 내고도 취업 사교육은 따로

취업길이 막힌 인문계 전공자들은 최근 IT·기술 관련 자격증을 따기 위해 따로 사교육을 받고 있다. 4년간 3000만원(4년제 사립대 평균)에 달하는 등록금을 내고서도 취업을 위해 별도로 돈과 시간을 들여야 하는 비효율과 낭비에 떠밀리는 것이다.

취업을 위한 인문계 전공자의 IT 관련 사교육 시장은 비용도 만만치 않고 경쟁도 치열하다. 코딩 교육기관인 코드스테이츠는 올해 들어온 수강생 2000명 가운데 70%가 문과 출신이다. 코드스테이츠의 김인기 대표는 “정부 지원이 있거나 취업률이 높은 부트캠프(코딩 훈련소)에 들어가기 위한 경쟁률이 20:1까지 올라갔다”며 “3개월 수강료가 800만짜리인 부트캠프도 나왔을 정도로 취업 교육 시장이 대입 사교육 시장만큼이나 뜨겁다”고 했다.

서울 상위권 대학 철학과에 재학 중인 황모(23)씨는 취업을 준비하면서 컴퓨터 그래픽과 포토샵, 모바일 앱 강의를 각각 3개월 코스로 들었다. 그는 “IT 기업은 물론 일반 회사의 기획 업무에 지원하려고 해도 IT·기술 관련 지식이나 자격증을 갖춰야 한다”며 “지난달부터 IT 스타트업에서 기획 업무 인턴을 하고 있는데 컴퓨터 그래픽·디자인 수업을 따로 수강하지 않았다면 인턴 전형에 합격 못 했을 것”이라고 했다.

조선일보 박건형기자 변희원기자 조유미기자 박지민기자(서울대 사회학과 4학년)